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야경’과 같은 수많은 걸작을 그렸고 당대에 명성을 얻었다.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하였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그에게는 붓과 기교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제라드 드 레이생
그는 자신의 상을 포착하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곤 했고, 자화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극적인 장면에서도 이런 감정들을 전달했다. 그 당시의 비평가들은 이 방법을 전혀 쓸데없는 짓이라고 충고했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이것은 자아에 대한 탐구였을 뿐 아니라 미술에 대한 탐구였다고 평가했다.
렘브란트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물감의 농도와 빛의 역할을 실험했다. 키아로스쿠로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기법으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작품들에서 처음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밝은 부분이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그 주위와 배경에 어두운 부분이 넓게 배치되어, 마치 어둠 속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것처럼 밝은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는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표현하던 주제 문제에 있어서의 엄격한 형식성을 제거함으로써 이와 같은 방법을 자신만의 전유물로 만들었고,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했다. 렘브란트는 비범한 사람들 속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주목하고, 작품에 일상생활을 그렸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직접 인쇄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에칭들을 제작했다. 그는 평생 회화로 얻은 명성만큼이나 판화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ㅡ501명의 위대한 화가중에서
※렘브란트 성화 모음 빛을 훔친화가, 빛과 암흑의 마술사, 렘브란트의 성화(聖畵) 토빗과 안나, 어리석은 부자, 그리스도의 승천, 위대한 사도 야고보, 스테판의 순교, 아브라함과 세천사 출처 : 여행하는강.. | 블로그 - https://naver.me/FgvnATB4
피카소와 그의 정부 마리 테레즈 발테르 사이에 낳은 그의 첫째 딸. 두 여인은 피카소의 그림에 영감을 준 뮤즈였다. 피카소는 딸을 유난히 사랑하여 1938년부터 2년간 '인형을 안고있는 마야' 시리즈 14편을 그렸다.'역사상 한 아이에게 바쳐진 가장 인상적인 시리즈'라는 평가를 받았다. 스페인 내전 학살을 그린 '게르니카'에도 인형이 등장한다.2차대전에 이르기까지 가장 궁핍한 시기에 마야는 그의 위안이었다. 물감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피카소는 딸에게 드로잉을 가르쳤는데 그 당시 스케치북이 최근 발견되었다.마야는 미술사학자로 피카소 그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한눈에도 피카소의 작품임을 알 수 있을 이 작품은 주된 주제인 딸 마야의 얼굴 정면과 옆면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런데 마야가 들고 있는 인형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주의 화가들이 이런 형태의 작업을 하는 이유는 캔버스가 평면이기 때문이다. 입체주의자들은 평면에 입체를 그리는 방법을 고민했는데 이는 평면에 구축하는 입체의 환영이다. 피카소가 선택한 방법은 정면성을 지키면서 형태를 분해하는 것이었다. 마야의 얼굴 표현이 바로 그 좋은 예다. 눈을 보면 정면에서 바라본 형태를 띠지만 코는 약간 측면에서 본 형태다. 다리도 마찬가지다.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은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형태로 표현된 얼굴은 왠지 온화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또 눈여겨볼 부분은 바로 색채의 이용이다. 물론 강렬하지는 않지만 색채가 초기 입체파의 그것보다 훨씬 밝아지고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사실 입체주의는 색채 이용이 강렬한 사조는 아니었다. 이는 형태에 치중했던 이유에서 비롯하는데 대상의 기하학적 형태를 사물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색채는 보는 이와 때에 따라 변화하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입체주의 작가들은 색채 표현에 치중하지 않았다"